박하식 충남삼성고 교장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을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학교교육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학교에서 교과 및 비교과 교육 활동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교육과정에 그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담아 문서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초·중등교육법』 제23조에 강한 어조로 명문화되어 있다..

이 법에 근거하여 교육부가 만들어 제공하는 교육과정 문서는 우리나라에서 인가된 초·중·고 학교에서 교과와 교육활동을 선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 문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학교교육과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공통 교육과정과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편성·운영한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 원칙이기 때문에 국가적 교육과정 정책에서 볼 때 고등학교는 당연히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어야 하고, 앞으로도 더욱 확대되고 충실한 ‘선택’ 중심이어야 한다.

작년부터 논의되는 ‘고교 학점제’란 사실은 고등학생들의 ‘과목선택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므로 이것은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교라면 당연히 해야 했던 고교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의 한 방법이다.

그런데 왜 이제야 고교에서의 과목선택제가 크게 주목받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교에서는 그 ‘선택’에 대한 권리를 학교가 주로 행사했다. 학교가 과목을 선택하고 학생들에겐 그 중 일부만을 선택하도록 해 온 관행 때문이다.

분명히 고등학교 교육과정 운영의 원칙이 ‘선택’인데 이 선택을 학생들에게 주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지탱해온 ‘학생관’과 ‘행정학급 중심의 학교 행정’, ‘진로가 아닌 진학 중심’의 관행적 학교 문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측면에서의 변화를 통해 고교교육과정의 방향을 재고하고 충남삼성고의 교육과정 운영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고등학교 학생관(學生觀)의 변화

고등학교는 교육과 삶의 단계로 볼 때 ‘대학교와 중학교’ 사이, ‘직업과 중학교’ 사이에 있는 교육기관이다. 그래서 고등학교의 모습은 어느 단계를 지향해야 하고 어떠한 연계성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진학계 고교의 경우 학교는 중학교의 모습을 더 많이 가져야할까? 대학교의 모습을 더 많이 가져야할까? 그리고 취업계 고교의 경우 중학생에게 요구했던 지식, 기능, 태도를 강조해야할까?

사업체에서 요구하는 지식, 기능, 태도를 강조해야할까?라는 물음을 갖고 그 답을 위한 고민 위에서 고교 교육과정은 설계되어야 한다.

고등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교육과 활동은 대학교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삶, 사업체에서 성인인 직장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우리 고등학교 교사들이 익숙한 중학교 학생들의 사고 방식, 생활방식, 교육방식 위주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우선은 고등학생들은 성인, 즉 독립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삶과 맞닿아 있는 시기라는 점이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의 가장 중요한 기초로 자리 잡아야 한다.

고등학교가 분명 ‘선택’ 중심의 교육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생들을 이른바 중학교 4학년에서 6학년 학생으로 보고자 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선입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인 성인으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부모나 교사보다 고등학생 ‘자신’인 것이다. 자신에게 진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고등학생들에게 있다는 믿음과 신뢰를 하게 하는 것이 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책임자들이 가져야할 학생관이어야 한다.

그래서 전 학년 ‘과목선택제’와 ‘졸업자격인증제(디플로마)’를 실시하는 충남삼성고등학교의 고등학생에 대한 학생관은 ‘Big Body’가 아닌 ‘Little Adult’이다. 고등학생을 예비 성인, 예비 대학생이라고 믿고, 그들에게 학습권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준비과정에서 복잡하고 힘든 절차가 있지만 자신이 선택한 ‘과목’과 ‘활동’에 대한 책임감과 참여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자거나 졸거나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과목도 아니고, 자신의 수준에도 맞지 않고, 자신의 진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선택하도록 권리를 주되, 자신이 선택한 과목에 대해서는 최저성취기준을 통과해야만 이수를 인정하는 책임도 지도록 하는 시스템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충남삼성고에서는 학생들에게 과목선택권은 보장하되 최저성취기준 미달 학생에 대해서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수업’ 및 ‘과제물’을 더 부과하고 이를 이수하고 제출해야만 다음 학기에 수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비성인으로 존중하되, 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책임 의식을 분명하게 갖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에서의 과정은 過程(과정)이 아니고 課程(과정)이다.

학교가 교육청의 교육과정 편성운영지침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시간표에 의해서의 3년 동안 過程(과정)을 밟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학교는 분명한 교육철학과 교육목표가 담기되 학생들의 선택이 보장되는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진로에 따라 선택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3년을 아무런 생각과 선택도 없이 짜준 시간표에 따라 흘러 지나가는(過) 것이 교육과정이 아니고 학교의 철학, 자신의 가치관, 진로에 의한 주체적 선택이 있도록(課) 하는 것이 敎育課程(교육과정)이기 때문이다.

충남삼성고는 자기주도적 학습인이 되기 위한 9대 습관을 정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자료제공=충남삼성고
충남삼성고는 자기주도적 학습인이 되기 위한 9대 습관을 정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습관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자료제공=충남삼성고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학습 집단’ 편성의 전환

국가교육과정 문서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기준에는 ‘학교는 일정 규모 이상의 학생이 이 교육과정에 제시된 선택 과목의 개설을 요청할 경우 해당 과목을 개설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선택 교육과정’인데 그 선택권을 고등학생에게 주는 의미있는 조항이다. 그런데 이 지침은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 후 학교에서는 실현되지만, 정규 교육과정 운영에는 적용하지 않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학교교육과정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교사’, ‘학생’이 ‘교과내용’을 중심으로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교사가 수업을 통해 만나는 ‘학습자들의 집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학년의 경우 입학하면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의 학력 관련 자료를 기준으로 균등집단으로 편성하여 학교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학급’이다. 이 ‘학급’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1년 동안의 교과 활동이 패키지로 자동으로 주어진다. 자기가 속한 학급의 인원이 몇 명인가와 관계없이 그 학급에게 주어진 한 학기의 시간표에 의해 반응해야 하고 순응하고 적응하게 되어 있다.

분명히 행정적 이유로 해서 큰 교육 과정적 고민 없이 형성된 ‘행정적 학급’에서 수업받는 ‘학생 집단’의 기본 단위로 지금까지 작용해 오고 있다. 2학년부터는 인문사회계열(문과)과 과학 공학계(이과)로 나뉠 뿐 학급은 같은 방식으로 편성·운영된다.

학교의 시설 및 인사 업무의 효율을 위해 고등학교에서도 ‘학급’이라는 행정적 구분이 필요하긴 하지만, 행정상의 학급은 학교 행정적 역할에 그쳐야 할 것이다.

모든 과목을 담임교사가 지도하는 초등학교에서는 행정학급이 교육과정상의 학습 집단이 되는 것은 맞지만, 선택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하는 고등학교에서는 행정상의 학급과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학습 집단은 구분되어야 한다.

충남삼성고에서는 행정학급 편성과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학습 집단 구성은 전혀 별개로 움직인다. 행정상 같은 학급 학생의 시간표는 모두 다르게 편성되기에 행정학급별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단 한 시간도 없다.

자신이 해당 학기에 수강해야 할 가이드라인만을 학교는 제시하고 자신의 선호과목 자신의 시간대별 신체상태도 고려하여 어떤 과목을 몇 교시에 배치하는 것까지가 가능하도록 하여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이 과목을 신청했을 때 어떤 기준으로 학습 집단이 형성되고 개설하는가에 대한 기준만을 제시하여 학습 집단을 편성하게 된다.

교육과정 운영을위해서는 행정적인 학급이 기본단위가 아니라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본 단위이어야 하고, 학교는 학교가 가진 시설 및 교원 수에 따라 수업집단 형성의 기준만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충남삼성고에서는 종례시간에만 학급담임과 학급원들이 만나서 학교정보를 나누고, 교과가 진행되는 일반 수업 시간에는 선택한 과목과 강의실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의 기능은 과목과 교사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강의실’이 주기능이고 행정학급이 모이는 것은 부수적인 기능이다.

따라서 행정학급별 모임은 담임교사가 배정받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운영하면서 ‘행정적인 학급’을 상수(常數)로 간주하는 고정관념을 버려야만 진정한 학생 선택 교육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충남삼성고 전경. 자료제공=충남삼성고
충남삼성고 전경. 자료제공=충남삼성고

학생의 진로를 고려한 교육과정의 편성

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선택을 기본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고 했을 때 또 하나 고려하고 준비해야할 것은 학생들의 과목 선택 기준이다. 즉 학생들이 고등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과목과 활동에 대한 선택권을 준다고 했을 때 학생들은 ‘어떤 기준’으로 자신이 수강할 과목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선택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 역시 국가교육과정 문서에 ‘학교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에 적합한 과목을 체계적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진로지도와 연계하여 선택 과목 이수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안내한다’라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학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표는 학생이 선택한 진로 중에서 직업 생활로 안정적이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생은 졸업 후 바로 직업세계에 나아가거나 4년 후 나아갈 직업 세계에서 요구되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고등학교 학생은 ‘배움’을 전업으로 하는 시기를 마무리하고 ‘일’을 전업으로 하는 시기가 곧 다가오는 단계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로의식을 바르게 갖도록 하고 자신의 진로에 따라 고등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을 선택하도록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충남삼성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과목을 신청하기 전에 적어도 자신이 직업으로서 하게 될 ‘일’과 관련지어 여덟 개의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진로와 하게 될 일과 가장 잘 맞는 과정을 선택하고, 그것에 맞게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여 진로의식 수준을 높여가게 된다. 과정별로 요구하는 단위는 20단위 이하로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진로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 본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중학교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자유학기제’의 원래 취지는 진로에 대한 탐색기간을 둬 진로의식을 갖도록 하고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므로 고등학교에서는 더욱 직업의 세계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진로 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은 ‘선택’이다. 그 ‘선택’이 교육지방자치단체의 선택, 학교의 선택이 아니라 고등학생 자신의 ‘선택’으로 그 중심을 옮기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바라보고 유지해온 고등학교 문화에 대한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신의 미래를 가장 걱정하고 책임지려는 예비성인으로서 고등학생을 존중하는 학생관의 변화, 교육과정의 기본을 학급이 아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고,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업(業)을 제대로 찾도록 돕는 방향으로 고교 교육과정은 전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