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여행·사진 작가

브로모 화산으로 향하는 길은 화산재로 뒤덮여 있다.

글 · 김동우 여행·사진작가

“관광과 여행은 다르다. 관광은 눈으로, 여행은 몸으로 하는 것.”

우연히 읽은 여행책 속 문구를 떠 올리게 할 만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의 시간은 여행이기보다 관광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물 한 병과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지럽게 얽혀있는 우붓골목을 걷다 도무지 복잡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솔길 하나를 발견했다. 길은 좁은 미로처럼 이리저리 허리를 꼬며 작은 언덕으로 이어졌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자 길은 서서히 풍 경을 바꿔놓으며 논길로 여행자를 인도한다.

고향의 논길과 꼭 빼닮은 좁다란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인기척에 놀란 오리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귀엽게 생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기도 한다. 도심의 소음은 바람이 만들어 놓는 벼들의 몸부림이 대신하고 강렬한 색으로 피곤함에 지친 눈은 푸른 초록 앞에 잠시 휴식을 한다.

전날 밤 내린 비가 논길을 질퍽하게 만들어 놓았고, 셔츠는 시간이 갈수록 따가운 햇볕에 젖어갔지만 그제야 몸이 반응하는 여행에 마음도 흡족해진다. 이렇듯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은 서정적 걷기는 발리 여행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이었다.

여전히 활동 중인 카와이젠 화산

이젠 화산의 조금 다른 이야기

며칠 뒤 발리 섬에서 자바 섬의 바 뉴왕이로 가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인도네시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산 트레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화산 중 카와이젠·브로모 화산은 놓칠 수 없는 장소였다.

이젠 화산에 오르려면 꼭 거쳐야 하는 바뉴왕이에 도착해 투어를 예약하고 다음 날 새벽 1시 화산으로 가는 작은 미니버스에 올랐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입구는 이미 몰려든 여행자들로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난 몇 시간 뒤 펼쳐질 풍경이 어떤 감동과 상념을 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트레킹은 쉽게 시작됐지만 산속으로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산을 원망이라도 하듯 거칠고 더운 숨을 한없이 몰아쉬었다. 끝모를 고갯길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모르는 편이 나아 보였다.

이젠 화산은 세계에서 딱 2곳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블루파이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새벽녘 산에 올라야 유황가스가 파랗게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다.

길은 비탈을 지나 산허리를 돌며 이어졌다. 그 사이 어둠 속에서 기습이라도 하듯 유황가스가 바람을 타고 사람들을 덮쳤다. 가이드는 출발 전 나눠 준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 유황가스가 온몸을 휘감자 마스크 틈 사이로 메케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뿌연 가스 사이를 헤쳐 나오자 블루파이어를 볼 수 있는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동이 트고 화산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분화구엔 백두산 천지처럼 파란 에메랄드빛 호수가 자리 잡고 있고, 한쪽에선 유황가스가 쉼 없이 분출되고 있었다. 인간의 접근이 허락될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놀랍게도 몇몇 인부가 유황을 채굴하고 있었다.

카와이젠 화산에서 90kg 가까이되는 유황을 지고 오르내리는 일꾼의 어깨에 남은 굳은살

한 인부가 자기 몸무게보다 더 나갈 것 같은 유황을 어깨에 메고 비틀비틀 산을 오른다. 그가 이렇게 일해 받는 임금은 우리 돈으로 하루 1만 5,000원 정도.

멋진 풍경을 찾아 한창 산을 찾을 때, 계절에 따라 좋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산이 하던 이야기는 미(美)에 대한 것이었을 게다. 이젠 화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을 걸어왔다.

드라마틱한 풍경보다 더 드라마틱해서 조금은 먹먹한, 얇은 두 다리의 허정거리는 걸음과 휘어져 버린 어깨가 삶을 대신해 하는 이야기….

브로모 화산에 가기 위해서는 지프를 타고 화산재 가득한 길을 달려야 한다.

브로모의 일출

씁쓸함을 뒤로 하고 인도네시아에서 꼭 봐야 할 화산인 브로모를 향했다. 브로모 화산을 보기위해선 프로볼링고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쎄모로라왕’이라는 산골 마을로 가야했다. 버스에 올라 1시간 반가량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랐다.

고도계가 2,000m를 넘어서고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을 즈음, 나지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에 도착하니 인도네시아에서 줄곧 나를 괴롭히던 더위가 확실히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새벽 3시, 숙소에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겨 나섰다. 숙소 앞에는 여행자를 태우려는 지프와 오토바이의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여행자를 태운 지프와 오토바이가 경주라도 하듯 흙먼지를 날리며 길을 내달렸다. 멀리 산을 오르는 불빛이 브로모 화산의 별빛만큼이나 초롱초롱했다.

출발 전 부산함만큼이나 목적지의 북적임도 만만치 않았다. 넓은 계단 길을 여행자 틈에 섞여 오르자 브로모 화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닿았다. 어둠을 빨아들이던 산은 어느새 조금씩 빛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밤의 산은 시간을 압축 시킨다. 힘들게 산을 오를 때면 밤의 산은 으레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목적지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밤의 산은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빚어낸다.

이젠화산의 웅장한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무

투박하게 산을 오르고 등골을 적신 땀이 적당히 바람에 날려갈 때쯤, 밤의 산은 비단결 같은 은은한 빛으로 잠에서 깬다. 경박하지 않으면서 튀지 않는 톤은 세기를 더해 화려하게 빛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거나 경건하게 눈을 감는다.

때론 잿빛 구름에 가려 상상하던 그림을 볼 수 없을지라도 밤의 산이 낮의 산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긴 마찬가지다. 수없이 오른 산, 셀 수 없을 정도로 밤과 낮의 경계를 경험했지만 여행만큼이나 질리지 않는 게 바로 이 순간이다.

마땅히 흘려야 할 땀은 없었지 만 브로모는 나와 상관없다는 듯 서서히 빛을 받아들인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한 사내 옆에 섰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낸다. 파인더 안 브로모, 한쪽 눈을 찡그리고 초점을 맞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초점링 위치는 무한대. 브로모가 내뿜는 압도감 만큼이나 멀리 있는 존재. 새삼 무한대에 위치한 산봉우리가 더없이 커 보인다.

살아 있는 화산은 숨 쉬듯 쉼 없이 연기를 뿜어내고 낮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 적막 해 보이는 화산은 그렇게 고요로 답한다.

브로모 화산 전경

해가 솟고 찡한 햇살 아래 브로모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틱한 한편의 공연이 끝나자 미련 없이 등을 보이는 여행자들. 여느 여행지는 밤이라야 침묵하지만, 브로모는 낮이 오면 적막에 휩싸인다.

사람들로 빼곡했던 전망대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이가 빠진다. 산허리를 감싸 안은 것처럼 포근하게 흐르던 구름도 덩달아 희미해진다. 어느새 전망대는 하루 장사를 마감하는 분위기다. 세차게 내리 뻗는 하얀 햇살 아래 회색 쓸쓸함이 피어오른다.

하루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편히 지친 다리를 누여야 할 것 같은 노곤함, 그래서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조급함. 발아래 먼저 산을 내려간 사람들의 움직임이 희뿌연 연무로 피어오른다. 자유로운 자유를 찾기 위해 모인 사람들.

브로모에 와봤다는 환희, 멋진 아침을 맞았다는 기쁨, 잠시 새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행복, 밤을 지나 다시 낮을 맞은 뿌듯함, 자주하던 말들이 속 안을 맴돌고, 자주 하지 않던 말들이 밖을 떠돈다.